●포스팅 제목이 다소 중2병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속해있는 독서모임에서 공통으로 읽고 있는 책 <왜 살아야 하는가>를 보다가 내가 평소 고민하던 이야기가 나와서 공감하며 재밌게 읽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사상가 10명의 이야기로 풀어쓴 책인데, 그 중 두 번째 챕터인 "쇠렌 키르케고르" 부분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조금 배경을 이야기 하자면,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어지는 철학자이다. (엄청난 인물이라는 뜻)
▶실존이 뭐냐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풀어 쓰기에는 너무나도 길기에 간단히 적자면,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선택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하고 이전 철학의 사조와 다르게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철학이라고 한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에 이르는 세 단계를 주장했는데 내가 공감갔다던 부분은 그중 첫 번째 단계인 <심미적 실존>이다. 책에서 말하는 <심미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따르며 육체적 만족과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심미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은 "삶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심미적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외적 환경에 구애받기 때문에 그 한계가 너무나도 명백하다. 즉 심미적 삶은 지속되지 않고 언젠가는 고통이 반드시 찾아온다.
심미적 삶에서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지만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우리 내면에서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공허함이 드러난다.
우리는 공허함을 무시하려고 애쓰지만 절망을 물리치지는 못하고 그저 주의를 돌릴 수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권태와 공허를 피하기 위해 온갖 일을 벌인다. 그리고 역사가 반복되듯 우리가 일을 중단하는 순간 동시에 권태와 공허는 다시 우리 곁으로 온다.
심미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권태란 삶의 자연스러운 근본 조건이자 원동력이지만 우리가 우리 내면에서도 마주하는 것이 공허이기에 공허를 결코 물리칠 수 없다.
▶나 역시 요즘 같은 현상에 빠져있다. 공허함을 잊기 위해 다른 취미나 모임을 가는 등 수많은 자극원(쾌락)을 찾아 활동하여 잠시나마 심적 고통을 잊지만 결국 그 순간 뿐이다. 내 주의를 잠시 돌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허로 돌아온다.
그래서 자극원들도 적당한 선에서 머무르게 하고 있지만, 그 <적당함>도 임시방편일 뿐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키르케고르"의 말을 듣다 보니 너무 공감이 되었던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심미적 삶>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심미적>이라는 이야기는 쾌락을 좇는 것을 뜻하는 바가 맞으나 그렇다고 철학적 사조 중 하나인 <쾌락주의>랑은 별개의 의미이다.
▶다행히 키르케고르는 우리는 늘 공허와 권태 속에서 고통받는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려준다. 그가 말하는 실존에는 세 가지 실존이 있고 그 단계가 있는데 순서로 보면 심미적 실존 →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 이다.
심미적 실존에서 이행의 조건은 <절망>이다 그것도 외부에 대한 절망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동물은 절망하지 않으며, 자연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절망을 하며, 절망은 "절대적인 것을 찾는 진정한 출발점"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신호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윤리적 삶은 보통 <의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무는 외부적으로 관계하거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롯이 <스스로에 대한 의무> 여야 한다. 윤리적 실존의 핵심은 언제나 <나>와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소명을 지니고 있고,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가 말하길, 우리는 침묵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이상을 의미하며 그것은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목소리 우리 주의를 돌리는 온갖 요소들로 가득한 번잡한 세계의 소음을 잠재워야 하며 그를 위해 인내심과 존중심을 발휘하여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침묵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면의 자아를 인식한다
★결론 : <실존>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중2병 비슷한 느낌이 살짝 나는 단어지만 사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적 사조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실존이라는 단어는 무수히 많이 들었지만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30 중반에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는 조금 이해가 된다. 이는 내가 요즘 느끼는 공허와 권태로움의 경험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바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가 말하는 종교적 실존 :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한 개인의 실존을 논하는 것 까지는 아직 이해가 잘 안 되고 모호하기까지 하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곳까지만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며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도 시간 내서 한번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P.S 1. 키르케고르 : 이름에 얽힌 일화
국립국어원의 덴마크어 표기 세칙에 맞는 표기는 '쇠렌 키르케고르', 영어 발음은 `소런 키어커가드'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일부 옛날 책에는 마치 키에르가 이름이고 케고르가 성인 것처럼 <키에르 케고르>라고 되어 있는 책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틀린 표기라고 할 수 있다.
▲P.S 2. : 사후 평가된 인물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그의 생애 동안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비타협적이고 자학적이며 급진적이기도 했지만, 그가 덴마크어로 대부분의 저술을 진행하여 유럽 사회에 그의 사상이 알려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한몫하였다. 그에 대한 논의는 1855년 사후 약 35년 후인 1890년도에야 겨우 역사에 등장하며, 그의 전집이 출판된 것은 1909년이었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것은 늦었지만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대접을 받게 된다.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실존주의나 기초 존재론에 대한 모든 사상은 그를 시초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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