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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및 책 속의 글

[★★★][서평 :과잉 존재]적당히 살 수 있는 사회 & 책임질 수 있는 세상

by Yum맨 2022.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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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맨의 별점 : ★★★ : 별 세 개! : 나와 나를 둘러싼 사회 속 사람들의 심리를 해석하는 관점이 넓어진 것에 의의를 둔다.

영화감독이 쓴 책이라 어떤 구성인지 궁금하고 책 자체가 180p라는 짧고 포켓북처럼 작은 크기를 가지고 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지만, 작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이 아무래도 무거운 주제다 보니 한 번 읽고는 전부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운 감이 있다. 그럼에도 책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주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조금씩 읽어내면 충분히 읽는데 무리가 없고 한번쯤 내가 살아온 길과 내 주변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이라고 생각이 든다.

●작가 : 김 곡 (1978년생 만 44세)

본업은 영화감독이다. 공동작업자 김선과 함께 ‘곡사’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다고 한다. 현재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포함한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전공은 철학이다.
책도 많이 쓰셨는데 저서로는 아래와 같다.

『투명 기계』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관종의 시대』
『과잉 존재』

(사진 출처        :http://enter.etoday.co.kr/view/news_view.php?varAtcId=63603
작가 정보 출처  :http://www.yes24.com/Product/Search?domain=ALL&query=%EA%B9%80%EA%B3%A1&author )

●병들어 가는 사람과 사회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사람들은 <화>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 <화>를 주체 못 해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정치병>으로 드러나 온갖 유튜브나 뉴스의 댓글에 남기기도 하고 <묻지 마 범죄>로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일이든 화를 내는 사람과 범죄는 늘 존재했겠지만 유독 최근에 들어 점점 그 빈도가 많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작가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배경에는 <과잉>된 사회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잉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이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은 과잉이란 <경계>를 잃어버리는 현상을 뜻한다. 경계란 결국 판별을 뜻한다. 과잉으로 인해 대상이 너무 많이 주어져 오히려 판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작가가 말하길, 이 사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말하지만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말하지만 사실은 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친구를 맺을 수 있지만 사실은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다. 거기엔 대상 자체가 없다. 

너무나도 많은 선택의 자유에 사람들은 오히려 선택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대표적인 현상이 <종교병>과 <정치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심각한 것은 요즘 횡행하는 <묻지 마 범죄>들과 우울증, ADHD와 같은 <각종 정신병>이다. 과거의 범죄는 사회와 나 사이의 경계가 있었기에 프로파일링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범죄들은 특별한 이유도, 경계가 없기에 프로파일링 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럼 이런 과잉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작가는 <경계를 지켜야 비로소 타자들과 마주칠 수 있고 이때 진짜 세계가 나타난다>고 한다. 즉 세계는 경계들이 질서를 이룬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곳인 셈이다. <진짜 세계>에서 사람들과 만나 관계를 맺고 여기서 나오는 갈등과 저항을 겪으며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고 전한다. 작가의 대책을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계를 만들어라는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책을 보고 느낀 것은 나 역시 과잉된 사회 속에서 자기 계발도 하고 직장을 다니며 평범히 살아가고 있지만 딱히 문제의식은 없었고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선 당연히 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돌아가는 양상이 전부 과잉되어 버리고 있다는 이 책을 읽고 세상은 지금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

0과 1로 표현되는 비트화로, 양 극단을 추구하는 과잉의 사회 속에서 우리 개인들은 방황하고 정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 사회의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사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밖에 없다.

(0과 1을 자본주의적 양극단으로 표현하자면 0은 가난한 자 1은 부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과 부)

작가가 제시하는 <밀당>으로 관계에 경계를 세운다는 말도 방법일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들은 과잉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약 2500년 전부터 부처, 공자와도 같은 성인들이 제시한 <중용> <중도>의 철학이 그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양 극단이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적절한 균형 속에서 우리는 행복(고통이 없는)한 삶을 위할 수 있다는 성인들의 말씀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2500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가기엔 벅차다. 사회적으로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한번 생각을 해 보며 조금 더 글을 써본다

이 책, <과잉 존재>에서는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현상의 배경에는 <과잉>이라는 물질적 정신적 풍요로부터 야기된 <경계의 소실>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책임>을 지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과잉 그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질의 풍요에서 우리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다만 수많은 선 사이에서 <책임>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인식이 없는 이 사회가 오히려 우리에게 독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인간에게 충동은 언제나 쭉 함께 하고 있는 감각이다. 충동의 근원은 우리의 욕구와 욕망이다. 예로 들어 우리는 지나가다가 매력적인 이성이 보이면 다가가서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배가 고플 때 뭔가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대가 없이 음식을 집어 먹거나 상대방의 동의 없이 신체를 만지면 어떻게 될까? 바로 법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를 알고 있기에 충동이 일어나도 행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익명을 방패 삼아 악플을 달면 대가를 치르지 않으리라 믿는 이들로 댓글창이 더러워지고 나이를 방패 삼아 범죄를 저질러도 대가를 치르지 않으리라 믿는 촉법소년들로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온갖 자기 계발과 동기부여를 받으며 현실과 크게 다른 부풀린 목표로 행동하면 당장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지만 현타라는 대가를 치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현실적인 책임을 지게 되는지 알려줄 수 있는 교육과 경험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그에 맞는 법 또한 만들어져야 우리 사회 및 개개인의 정서가 바로 잡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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